2020-10-15
태어나 처음으로 선물 받은 시집이 최승자 시인의 《이 시대의 사랑》이었다. 그분께서 '내 청춘의 영원한' 이라는 시를 모르냐며 놀라시더니 다음 만남에 이 시집을 주셨다. 그리고 다시 뵙진 못했지만 감사했다. 선물 받은 밤에 가장 먼저 <내 청춘의 영원한>을 읽었는데 '괴로움 외로움 그리움' 이 세 단어에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. 그 감정들이 마구 섞여 검고 진득해졌다. 그곳에 빠져들까 무서웠다. 나는 아직 이 시집을 견딜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.
그러다 그분께 이 시집은 최승자 시인이 써온 시들을 몇 년 단위로 묶어서 순서대로 싣고 있으며 젊은 날 미숙하고 어설픈 글들도 가감없이 그대로 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. 그걸 듣고 최승자 시인이 존경스러웠다. 시간이 지나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고쳐쓰고 싶기 마련인데 최승자 시인은 그 나이, 그 상황, 그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자 그대로 둔 것이다. 어쩌면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시집에 드러내려 한 것일 수도 있겠다.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맨몸을 턱 내놓은 시집이란 걸 알고나니 다시 시를 읽고 싶어졌다. 그리고 이전과 달리 다른 시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은 위로를 느꼈다. 다정한 가사의 노래보다 아주 슬픈 음악에 더 마음이 풀릴 때도 있듯이 말이다. 최승자 시인은 언어를 꾸며내지 않는다. 슬픔은 슬픔, 그리움은 그리움이다. 특히 <네게로> 뿐만 아니라 <개같은 가을이> 에서도 나오는 죽음과 매독이란 단어는《이 시대의 사랑》에서 가장 날 것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. 날 것의 감정을 날 것의 언어로 쓴 시는 폭력적이고 슬프지만 마치 살과 살이 닿는 듯한 온기를 줬다. 이 시들은 원초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에 공감과 위로를 불러 일으킬 수 있고, 더 나아가 맨살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. 그래서 나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'접촉의 장'이라고 말하고 싶다. 그곳은 치장이 없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촉하고 기댈 수 있는 공간이다.
그날 밤 만난 당신은 국문과 학생이랬다. 나는 시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고 당신은 내가 쓴 글 몇 편을 읽어주었다. 우리는 인파가 많은 홍대 광장 계단 한 켠에 앉아 있었고, 나는 당신이 글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. 봄 치고 쌀쌀한 밤이었다. 우리는 아무 사이가 되진 않았지만 다음 번 만남에 당신은 내게 시집을 선물해줬다.